‘좋음’에서 ‘매우 좋음’으로
“매우 좋다”는 통치의 성명서이다.
창세기의 첫 시작 장에서 창조는 반복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불리운다. 빛은 좋은 것이다. 땅은 좋은 것이다. 식물은 좋다. 동물들도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나타날 때에야 하나님은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고 선언하신다(창세기 1:26-31). 이것은 인류가 등장함으로 자동적으로 산들이 더 나아졌거나 강들이 더 깨끗해졌거나 동물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류가 창조 세계의 청지기, 지도자, 관리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매우 좋았다”는 환경에 대한 성명서가 아니다. 그것은 통치의 성명서이다. 지도력의 성명서.
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창조물 안에서 도덕적 책임과 관계적 책임, 의도적 청지기직을 할 수 있을 때에 “매우 좋았다”는 것이 된다. 인류는 우리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이마고 데이 (하나님 형상)에 대한 우리의 책임 때문에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된다. 창세기에서 인류에게 주어진 첫 번째 부르심은 예배도, 설교도, 기관들을 세우는 것도 아닌 바로 통치였다(창세기 1:26-28). 올바르게 이해된 통치권은 청지기직을 말한다. 그것은 지도자에게 맡겨진 것을 발휘하기 위한 지도력이다.
시편 기자는 이와 똑같은 생각을 드러낸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시편 8:3-8). 인간은 소유자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한 신뢰받는 통치자로 묘사된다. 이것은 위임된 권위이지 절대적인 권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격이 아니라 책임이다. 청지기직으로서의 통치 모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는데, 그 점에서 인간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
이사야는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데려오며 딸들을 땅 끝에서부터 데려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부불려지는 모든 자들 곧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을 오게 하라. 내가 그를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다(이사야 43:6-7).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는데, 이는 인간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면, 지도력, 혁신, 경제, 기술 역시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인간을 섬기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지점이 우리 시대와의 대화가 깊게 관련되는 지점으로, 특히 4차 산업혁명(4IR)을 말하는 시대에, 또한 발전한 주요 국가들 가운데에서 개발되고 있는 나라에 속한 나의 배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풍경들과 도시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자동화 시스템, 생명공학, 데이터의 힘을 통해 지식과, 경제, 생물학과 의사 결정 시스템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전 세대들에서 지배는 바퀴와 불, 금속 물질을 발견 발명하는 것이나, 농업을 배우고, 밭을 갈고, 도로를 건설하는 것등을 의미했다. 오늘날 청지기직으로서의 통치권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일하고, 생각하고, 심지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알고리즘의 제작, 시스템 설계, 기술 구축등을 의미한다.
우리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명과 실천이 윤리적, 사회적, 영적 책임과 엮이어 있는지의 여부이다. 기술은 항상 그것을 구축한 사람들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의 성경적 역사에서, 가장 초기의 기술 개발들 중의 하나였던 글쓰기가 시민적 생활과 도덕적 책임을 형성하는 율법들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람들은 급속한 사회 발전의 기간중에도 그들의 집단적 정체성과 윤리적 책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때에도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았으며, 개인적 또한 공적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반영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1]되었다.
다시 말한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가치를 반영하는 사람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차 산업혁명(4IR)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탐색하게 된 기술적 변화가 아니다. 쓰는 기술을 통해 언약이 보존되고 율법이 기록되었으며, 사회는 정의, 책임, 사회적 책임을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졌으며, 여기에는 땅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빚은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지, 지도자들의 책임은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있게 되었다. 쓰는 기술은 매우 실제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기억하는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켰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활동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 활동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 데이터 시스템은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도구들은 우리의 세계에서 새로운 기억 시스템이 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지의 여부 뿐 아니라 이러한 기술들이 우리의 도덕적 책임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지 또는 도덕적 책임이 없는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항상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형성시킨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도전은 우리가 창조하는 도구와 구축하는 시스템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믿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종류의 세상에서도 보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존재가 창조에 대해 “매우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였다면, 4차 산업혁명역시 인간이 종의 지도력을 행사하게 될 때 좋거나 심지어 매우 좋게 될 것이다. 종의 리더쉽이 없다면 기술은 통제, 수익, 권력을 위한 도구가 된다. 종의 리더쉽과 함께, 기술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인간의 번영과 존엄, 사회적 유익을 위한 도구가 된다.
4차 산업혁명에서 사회적 종이 되어 선교와 실천을 행하는 일은 리더쉽 책임에 대한 다른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단순히 “이 작업을 자동화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동화가 가정들과 지역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단순히 “이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이 데이터가 사람들을 섬기는데 사용될 것인가, 아니면 통제하는 데 사용될 것인가?”를 묻는다.
단순히 “이것이 수익을 낼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이것이 정당하고 공정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단순히 “이것이 효율적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이것이 인도적인가?”를 묻는다.
창세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타락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책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문제이다. 창세기에서 “좋다”에서 “매우 좋다”로 옮겨지는 움직임은 잘 만들어진 땅에서 잘 관리되는 세상으로 옮겨가는 그런 움직임이다. 잘 인도함을 받는 세상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이는 웨슬레안 신학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요한 웨슬리는 사회적 거룩함이 없는 거룩은 없다고 가르쳤으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 보여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형상을 품는 것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 웨슬리는 구원에 대해 설교했지만, 그는 또한 학교를 설립했고, 의료 지원 조직을 만들었으며, 소액 금융 시스템을 만들고, 교도소를 방문했으며,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했다. 웨슬리에게 이것은 정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적 삶을 통해 나타나는 제자도였다. 이러한 모범을 보여 주는 섬김 중심의 리더쉽은 세상을 좋은 곳에서 매우 좋은 곳으로 옮겨 가게 한다.
이 웨슬레적인 비전은 세계가 빠르게 도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특히 그러한 일이 현저한 개발도상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어진다. 도시화는 기회들을 가져오지만, 이는 또한 혼잡한 도시들에 인구 밀집, 비공식 주택, 실업, 불평등, 사회 분열, 외로움이라는 압박도 가져온다. 이러한 많은 환경에서 교회는 종종 지역 사회 안에서 몇 안 되는 안정적인 기관들 중 하나가 된다. 이것은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주일 예배나 내부 프로그램으로만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레적인 이해에서 선교는 사회적 책임을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일, 주택, 교육, 건강, 가정 생활, 경제적 존엄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창조세계를 책임있는 청지기로서 “매우 좋다”로 만들도록 인도 받았다면, 교회는 이 청지기직을 도시에서 모델로 삼아야 한다. 성경에서 인간의 움직임은 항상 선한 것에서 매우 선한 것으로의 방향을 따르고 있다. 동산에서 나가서 모이는 장소인 도시로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는 지역 사회 안에서 종으로서 섬김의 리더가 되어야 하며, 존엄을 보호하고, 경제적 책임을 장려하고, 가정들을 지원하고, 청소년을 교육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교회는 도시에서 가장 큰 기관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책임있는 기관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도시 환경에서의 종의 리더쉽은 교회가 다른 질문들을 던지도록 요구한다. “어떻게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가 아니라 “우리가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세대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어떻게 참석자 수를 늘릴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러나 “어떻게 각 사람 안에 있는 이마고 데이 (하나님 형상)를 공경하도록 하는 존엄을 키울 수 있을까?”를 묻는다. “어떻게 더 큰 건물들을 지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강력하고 회복 탄력적인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우리는 전례 없는 속도로 강력한 시스템들을 창조해 내고 있지만, 책임있는 지도자들이 동일한 속도로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진정한 위기는 기술적 위기가 아니라 도덕적, 형성적 위기이다. 더 깊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세상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누가 형성하고 있는가?
사회적 책임에 선교와 실천을 주입시키기 위해, 우리는 오래된 생각 하나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즉 리더쉽은 신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청지기직에 대한 것이며, 직위가 아니라 책임, 세상에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도록 위탁된 것이라는 점 말이다.
좋은 것에서 매우 좋은 것으로
세계는 인간이 그 안에 청지기로 세워졌을 때 “심히 좋았다”고 불렸다(창세기 1:26-31). 인간은 책임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려졌으며 하나님의 손의 역사에 위탁되었다(시편 8:3-8 참조).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이사야 43:6-7). 웨슬레의 비전에서 거룩함은 개인적 경건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에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세상은 인간을 향한 최초의 부르심인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있게 섬기고, 이끌고, 돌보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간이 기억할 때에만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대에도 좋은 것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선교는 착취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영적 실천은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종의 리더쉽과 사회적 거룩함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의 리더쉽은 여전히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대로, 곧 좋은 것에서 매우 좋은 것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대략적으로…
가브리엘 J 벤지먼 박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1] Benjiman, G, 2023. The Church and the Work of Lifelong Learning: Embracing new language, New Technology and New Responsibilities. Aspire Magazine, Africa Nazarene Universi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