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국제총회감독으로서 나의 시작으로의 여정 구스타보 크로커
국제총회감독으로 봉사하는 많은 특권과 축복 중 하나는 다양성과 일치가 가득한 아름다운 교회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올 해에는 그 특권과 축복을 엄청나게 누릴 수 있었는데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 가운데 내 삶과 사역과 부르심이 시작 되었던 모든 장소들을 다녀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 이 모든 것이 6개월 간의 관할 임무 담당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이 일은 2023년 3월에 시작되었다. 나는 배정된 관할 임무를 따라 나의 출신 나라인 과테말라로 갔는데 그곳에 여러 연회의 총회 일정들이 잡혀 있었다.
나는 3월 1일 과테말라 시티에 도착했고, 3월 2일 서부 고지대에 있는 과테말라 북서부 연회 총회로 운전해 갈 준비를 끝냈다.
여행팀은 목사 안수식과 총회가 열릴 우에우에테낭고에 오전 9시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이 되기 전에 도시를 떠났다. 과테말라 시티에서 우에우에테낭고까지의 여행은 건축학도로서 (당시) 멕시코 중미 (MAC) 지구의 나사렛 교회들을 디자인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그곳에 갔었던 나의 첫 방문을 떠오르게 했다. 우에우에테낭고에 있는 제일 나사렛 교회는 내가 1985년에 설계한 최초의 건물이었으며1986년에 그 완공 과정을 감독했다. 젊은 건축학도로서 방문했던 마을로 돌아와서 호스팅을 받게 된 것, 또한 내가 설계하고 감독한 첫 번째 교회 건물로 돌아온 것은 놀라운 특권이었다! 그 건물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이 교회 회중이 증인으로의 역할이 더욱 강해지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3월 3일에 북서 연회에서 과테말라 서부 연회 총회로 운전해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3월 4-5일에 열릴 과테말라 중부 연회의 주말 총회와 안수식을 위해 이 나라의 수도로 돌아왔는데 바로 나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다. 1983년 부활절 주일에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곧 출석한 교회가 바로 이 연회에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연회 청소년들중 몇 친구들은 이제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당시 나의 목사님 중 한 분의 아들을 안수하는 특권도 누렸다. 제 첫 고향 연회의 그 교회는 나를 선교지에서 돌아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나를 자신들의 자녀처럼 맞아주었다. 내가 과테말라 교회에 처음 들어온 후 지난 4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청소년부의 친구들은 내가 지구촌 나사렛 가족의 다이아몬드기념해(75주년)에 교단의 정회원으로 받아졌다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 연회 총회는 지난 40년 동안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크게 상기시켜 주는 모임이었다!
과테말라를 떠나서 레이첼과 나는 3월 6일부터 13일까지 한 주간 동안 바베이도스, 앤티가, 세인트빈센트, 트리니다드에서의 연회 총회 일정을 따라 여행했다. 영어권 카리브해 지역에서 나사렛 교단의 사명과 메시지, 정체성을 전할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교회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모임들이었다. 이 섬 나라들에 대한 방문은 팬데믹 이후 첫 국제총회감독의 방문이었기에 지역에서의 기대가 컸다. 그들이 큰 기대로 기다려 왔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과테말라 북동부 지역에서의 예정된 연회 총회들을 마무리 하기 위해 3월 13일에 카리브 해를 떠나 과테말라로 다시 돌아왔다.
3월 15일부터 18일까지 우리는 과테말라의 베라파즈 연회에서 총회를 가졌다. 이 나라의 베라파즈 주는 과테말라 나사렛교회 역사에 있어 상징적인 곳이며, 나의 가족에게도 매우 특별한 곳이다. 베라파즈 연회는 나사렛교회 해외 선교지역을 통틀어 교단 내에서 "정규"(3단계) 지위를 획득한 최초의 연회였다. 이곳은 또한 나의 부모님이 1956년에 교회의 선교 사업을 통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하게 된 연회이기도 했다. 이 나라의 원조 연회로서 바레파즈 연회는 전국적으로10개 이상의 연회를 탄생시켰을 정도로 국내 선교력이 강했으며, 지금도 영적으로나 규모적으로나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3월 17일의 북베라파즈 연회 총회 역시 나에게는 또 다른 귀향의 성격이 되었다. 부모님이 남부지역에서 이곳 코반으로 이사하셨을 때 나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들은 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1969년에 이 최초의 교회에 합류했다. 이번에 나는 나의 부모님이 주님을 만난 연회의 모임을 주관하기 위해 돌아왔다. 창립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이 연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금년에 만도 이 연회는 더 많은 선교 교회를 시작했으며 10개의 새로운 교회를 조직했다.
우리는 이 “어머니 연회”에서 베라파즈 남부 연회 총회를 위해 3월 18일에 산미구엘 치카이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 연회 모임 또한 집으로의 귀환의 성격이 되었다! 연회는 과테말라 내전 당시 나사렛 구제사역부에 의해 지어져 1985년에 봉헌된 이전의 호가르 델 니뇨(Hogar del Niño) 고아원 캠퍼스에서 열렸다. 이곳은 내가 우리 교단의 구제사역 분야에서 처음으로 관련하게 된 곳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나의 건축가 멘토와 나는 전체 14개 건물 단지의 설계자였으며, 지금은 세상에 없는 나의 처남과 나는 이 건축 프로젝트를 위한 수십 개의 ‘사역과 증인’ 팀의 작업을 감독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수십 년 전 교회가 취약한 과부와 고아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예배했던 장막의 단상에 다시 서 있게 된 경험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큰 격려가 되었다. 내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차 올랐다. 하지만 더 놀랄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19일 주일은 예상치 못한 축하의 날이 되었다. 예배는 60년 전에 내가 태어난 작은 마을인 산 헤로니모(San Jerónimo) 교회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부모님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곳이 바로 그 작은 교회였다. 태어난 지 몇 주밖에 안 된, 의사들이 포기한 이 병약한 아이를 나의 어머니는 바로 이곳에서 주님께 바치셨다. 나의 누이가 코비드 19로 숨지기 까지 그녀의 마지막 날들 동안의 예배 가운데 섬긴 곳도 바로 이 교회였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초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교회와 지역 관료들이 함께 모여 나에게 축하를 전하고 (과분하게도) “산 헤로니모의 특별한 아들”이라는 선언으로 나에게 영예를 주었기 때문에 이 놀라움은 더욱 컸다. 이는 마을 출신자로는 처음으로 받게 되는 영예였다. 그 교회의 제단에서 드려졌던 아기가 이제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의 증거로 나타나지고 있었다. 지방 행정 관료들, 교단의 국가 및 지구 지도자들, 그리고 몇 몇 나의 가족들과 교회 식구들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어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나와 같은 가장 연약한 그릇까지도 그 분의 섬김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우리는 아틀란틱 연회 총회를 끝으로 과테말라 연회들에 대한 인도를 마친 후 온두라스로 가서 그곳 교회들의 집회를 인도했다. 온두라스로부터 우리는 연회 감독들을 만나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여행했으며, 이 후 집으로 돌아와 또 다른 귀향 축하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4월 15일에 우리는 미드 아틀란틱 연회 연회 총회를 위해 미국 메릴랜드로 여행했다. 이것은 레이첼과 나에게 또 다른 귀향이었다. 우리가 미국 동부해안에서 사역하는 동안 레이첼은 이 연회 사무실의 직원으로 봉사했었다. 2003년 4월 11일에 폴 커닝햄 Paul Cunningham 박사에 의해 내가 목사로 안수 받은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글로벌 사역과 최첨단 선교적 사고에 대한 나의 패러다임 중 많은 부분이 그곳에 있는 동안 형성되었다. 이번에 관할 국제총회 감독으로 다시 여기에 돌아온 것은 축복이었다. 나는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계획을 교회로서 확인해 주었던 그 제단을 다시 방문하는 축복을 얻었다. 4월 16일 일요일 저녁, 그 곳에서 남성과 여성들에게 내가 받은 그 축복을 안수를 통해 전달하는 그 특권으로 인해 나는 감동이 되었다. 나와 가족을 품어준 곳은 여전히 나에게 집이었다. . .
귀향으로서의 여행은 이 후 여러 연회 총회와 6월의 국제총회 기간 동안 잠시 쉬었다. 그러나 이 일상적인 관할권 임무 순환의 일부였으나 "계획되지 않은" 섭리적인 여행이 한 번 더 있었다.
7월 24일, 팬데믹으로로 인한 1년 동안의 지연 후, 나는 마침내 오하이오 남서부 연회 총회를 위해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도착했다. 또 다른 귀향의 모임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1990년에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과테말라에서온 대학원생으로 개발 계획 전문 연구를 위해 신시내티 대학을 선택했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대학원 교육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전임 사역자로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일시적으로 신시내티로 이주하는 것임을 그 때는 몰랐다.
바로 그곳, 신시내티에 있는 몬타나 애비뉴 나사렛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전임 선교사로 부르셨다.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며, 하나님의 성결케 하시는 은혜를 내 삶에서 경험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저는 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축복을 받았고, 이민자 가족을 그들 가운데서 환영하고, 사랑하고, 포용하고, 함께 빵을 나누면서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 신시내티 교회에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을 일부러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놀라운 특권이다. 여행을 하며 교회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특권 그 이상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나의 첫 시작의 모든 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구스타보 크로커Gustavo Crocker는 나사렛교회 국제총회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