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의 수려한 직물
현대 신학이라는 직물은 근대 시대에 일어난 지적, 문화적 변화들이라는 실로부터 짜여져 있다. 크리스천 신학자들은 이러한 실을 새로운 신학적 이미지로 꿰어 짜냄으로 그러한 변화들에 대응했다.
근대라는 판형
종교 개혁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세계관에 있어 주요한 변화의 문을 열었으며, 계몽주의는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유럽과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18세기에는 이성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었으나 이것이 19세기에는 감정적 표현(낭만주의로 알려진)으로 이동했다. 20세기 초까지는 전통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들이 있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외곽 선 안에 색상을 입혀야만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 방식은 크게 보아 모더니즘이라고 불리었으며, 종교 사상 측면에서 모더니즘은 전통적인 사고 방식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의 반발을 촉진시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등에서 근본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2차 세계 대전을 지나며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향한 자극이 극적으로 증가하였고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만들어 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초기 근대 시대의 논리적 냉정함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이지만, 후기 근대 시대에 나타난 회의주의의에 대한 연속이기도 했다.
종교 개혁 이후의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맥락 안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 왜냐하면 각 시대의 신학자들은 기존의 어떤 기준점이 되는 지점과 그 당시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지적 발전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8세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요한 웨슬리가 종교 개혁 신학과 계몽주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19세기 초에는 루터교 목사인 프리드리히 슐라이르마허가 전적으로 감정과 느낌에 기반을 둔 낭만주의적 버전의 기독교를 창조했으며, 이후 2차 세계 대전 시대까지 이어지는 신학자들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슐라이르마허와 씨름했다. 20세기가 접어들면서 근본주의자들의 반응이 나타났을 때에, 신학자들은 그들과 자유주의적 개신교도들 사이를 중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나타난 칼 바르트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운동을 부분적으로 촉진시켰다. 20세기 후반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 있던 기준선 사이를 중재했다.
모더니즘의 가닥들
모더니즘의 첫 번째 가닥으로 나타난 것은 신뢰라는 것이 전통으로부터 개인적 경험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된 11세기 이후, 스콜라 신학자들은 우리의 모든 아이디어들이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왔다는 신념인 경험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경험주의의 부상은 궁극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종교 재판 시대의 이견에 대한 억압을 향한 도전이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대학들을 설립하고 대중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지식은 경험적 체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더 많은 경험을 통합할 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스콜라주의 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의 통합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데, 특히 신학과 철학을 병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전적 타락의 교리를 거부하며, 모든 사람 안에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의 어떤 부분이 남아 있기에 우리가 자연 계시(즉, 창조물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각인)를 인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특별 계시(즉 그리스도와 성경)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지만, 이 두 가지 유형의 계시는 서로 양립할 수 있다. 이것이 가톨릭 신자들, 영국 국교회들, 웨슬리주의자들로 하여금 이성, 전통, 경험을 성경 해석의 지침으로 사용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개신교 개혁자들, 특히 루터는 이것들 중 어느 것도 갖지 않았던것 같다. 그는 성경이 우리의 유일한 계시의 근원이므로 (오직 성경),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해력과 교육의 성장은 모더니즘의 또 다른 가닥으로 이어지게 했는데, 이는 공동체에서 개인주의로 강조하는 것의 전환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더 많이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으며, 모든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정 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반면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칼빈을 따라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세기도 안 되어, 선행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양심과 자유 의지를 제공한다는 아르미니우스의 제안은 개신교의 지배적 시각이 되었다. 개인주의를 향한 운동은 개신교도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장려했다. 개혁자들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권을 강조함으로써 우연히 그 문을 열었다. 모든 종류의 개신교 종파들이 처음에는 유럽에서, 다음에는 서쪽으로 확장하며 미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인에 대한 강조는 또한 서양의 민주화를 가져왔는데, 이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이 특정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도록 지정하셨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주들은 권력을 박탈당하거나 완전히 교체되었다. 새로운 기독교 종파들 또한 점점 더 민주적이 되어, 목회자의 권력과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모더니즘의 다음 가닥은 신비주의에서 자연주의로 전환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주와 유기체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어떤 전통적인 믿음들에 대해 도전이 되었다. 우리는 이를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연의 패턴이 수학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우리에게 사건들을 예측하고 결과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루어낸 과학적 발전은 지식은 경험적 관찰을 통해 얻어진다는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과학적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이 지식을 믿음에 통합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격차도 커졌다. 근본주의자들은 과학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과 조화를 이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과학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연과학이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만드신 자연법칙 밖에서 일상적으로 행동하고 계시다는 그들의 믿음에 도전을 던지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싸우고 있다. 신비주의자들은 사회과학과 씨름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종교적 경험에서 신비적 요소를 없애기 때문이다.
직조물 속의 이미지들
근대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실타래들을 기독교 신학의 네 가지 주요 영역으로 짜냈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성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여전히 은혜는 성찬들을 통해 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찬 안에 신비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개신교도들은 이 생각을 거부하고, 성례를 세례와 성찬으로 줄였으며, 그것들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음을 통해 이미 받게된 은혜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기독교 교리를 확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보통 공식적인 신조(예를 들어, 사도신경)를 통해 표현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 중생의 모델은 기독교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더 깊은 질문들을 제기했다. 19세기가 접어들면서 슐라이어마허는 참된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의식”이라는 느낌, 즉 하나님께 대한 의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믿음은 급진적이고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따라서 기독교 교리가 우리에게 터무니없이 보이더라도 역설적으로 그들을 믿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 후의 신학자들은 실존주의라는 렌즈를 통해 기독교를 해석함으로써 이 개념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복음서들의 역사성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며 가장 관계가 있는 것은 우리가 그들로부터 얻게되는 더 높은 수준의 실존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님의 문자적 부활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부활 이야기의 계시적 가치는 우리 자신의 영적 부활을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어떤 근본적 교리를 믿지 않는 한,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반응을 가졌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이 세 가지 기둥 사이에 다양한 위치를 제시했는데, 바르트의 저작들이 여기에 굳게 서있다.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바르트의 중대 저서가 ‘교회 교의학’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성경의 본성과 권위에 대해서도 더 넓은 논의가 있었다. 개신교 개혁자들은 성경이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명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 방향으로 크게 기울였다. 루터는 성경이 다른 어떤 다른 출처에 대해 기대있지 않다고 믿었고, 칼빈은 성경은 너무 완벽한 책이어서 우리를 위해 성경을 정경화한 교부들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계속해서 성경을 교회의 권위라는 밑에서 보았다. 왜냐하면 가톨릭 주교들이 사도들의 권위적 계승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이 모든 것이 두 가지 수준에서 도전을 받았다. 첫째, 고고학자들은 신약 성경의 오래된 사본들을 발견했는데,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 온 본문 중 일부는 실제로 수정과 추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들은 원본 문서들(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에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낮은 성서 비평”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복음서들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비평가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예를 들어,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예수님의 생애)와 알버트 슈바이처(역사적 예수 연구)는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과장된 모습을 제공한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와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우리가 “고등 성서 비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응은 강렬했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두 배로 강조하여 그것을 모든 주제, 심지어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문제들까지 확장시켰다. 그들은 고등 비평을 단호히 거부했고, 몇몇은 낮은 수준의 비평까지 거부했으며, 킹 제임스역이 유일하게 진정한 영어 성경 번역본이라고 주장했다. 근본주의자들은 또한 '오직 성경'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했으므로, 진화와 우주의 오래된 나이등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르트는 성경을 신화로 가득차 있다고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성서 저자들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제안한 것은 계시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템플릿을 제공했으며, 이는 그를 따르던 신학자들의 대화를 바꾸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계시는 하나의 사건이지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다. 본문은 계시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중심이다. 바르트는 자연계시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이 아이디어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늘날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어떤 종류의 자연 계시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를 이해하는 데 대한 바르트의 새로운 모델은 후대의 신학자들에게 연구 비평의 대상으로서의 성경에 대해 두려움 없이 신뢰성과 중심성을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직조물의 다음 부분은 새로운 이미지가 아니라 전통적인 이미지, 즉 하나님 개념을 대체하기 위한 부름이다. 이것은 20세기의 두 진영에서 나왔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존재이기에 전통적인 하나님 개념들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폴 틸리히는 하나님이 무한하다면, 존재들은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은 존재(실재) 자체이다.
다른 한 쪽에는 하나님이 사실 무한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 과정 신학자들이 있었다. 찰스 하트숀은 하나님을 “가능한 가장 위대한 존재”로 묘사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들을 훨씬 뛰어넘는 고도로 진보된 존재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개념화하는 것은 악의 문제를 다루는 편리한 방법이었으므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이후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과정 신학과 그 동반자인 열린 신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지만, 윤곽은 다소 바뀌었다. 초기 과정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오늘날의 일부 과정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리를 온전히 동정하심과 같은 더 큰 이유로 그의 전능성에 대해 내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확인할 마지막 형상은 교회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근대 신학자들이 교회에 대해 가졌던 논의는 세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질문은 교회의 사명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다. 이 질문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 복음 운동과 함께 예리한 초점이 되었다. 월터 라우센부쉬는 뉴욕시의 지옥 키친 구역의 목회자로 살며 보게된 모습들로 당황하게 되었다.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무관심이었으며, 그는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영적 갱신이 아니라 사회 개혁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죄악된 태도와 관행들이 이제 산업화 사회에서 제도화되었으며, 이러한 불의를 시정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복음운동의 정서는 2차 세계 대전 시대에 사라졌지만, 1960년대에 다양한 “해방 신학”의 형태로 돌아왔다. 이 중 첫 번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왔는데, 20세기 말까지 다양한 해방 신학들이 나타났다.
다음으로 현대의 신학자들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고려했다.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저작물 중 하나는 1951년에 처음 출판된 H.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이다. 에른스트 트롤취의 초기 연구를 바탕으로 니버는 기독교 전통들이 역사적으로 교회와 사회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았던 다양한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유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 쯤에 이 그룹들 사이의 경계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은 많은 신학자들을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죄로 가득찬 세상에서 기독교 원칙들을 지키기 위한 실용적인 접근법을 택하도록 자극했다. H. 리처드 니버의 형제 라인홀드는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이 실용주의를 기독교 현실주의라고 불렀다.
더 최근에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고려는 우리를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가도록 이끌었다. 아미쉬, 메노나이트, 형제회와 같은 아나뱁티스트(재침례파) 그룹들의 영향으로 인해 복음주의자들은 20세기 말까지 정치에 많이 관여하지는 않았었다. 재침례 주의자들보다 덜한 정도로 복음주의자들은 주류 사회와 분리되고 구별된 상태로 남아있으려고 시도했다.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 가톨릭신자들과 일반 개신교도들을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에 관여하기를 거부했으며, 디트리히 본회퍼는 반역죄로 교수형을 받기 전에 수형 캠프에서 그들을 비판했다.
1960년대에 시작된 문화적 혁명은 하나의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전통적인 신념들과 사회 구조가 특히 젊은 세대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해방 신학들은 이러한 변화들 중 일부를 옹호했으며, 이로 인해 보수주의자들은 이제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관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72년에 메노나이트 윤리학자 존 하워드 요더는 예수님의 정치를 출판했으며,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공적 광장에 참여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 변화는 스탠리 하우워스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은 영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신학자들의 영향력은 결국 '도덕적 다수'와 '기독교 연맹'과 같은 복음적 정치 운동들에 의해 가라앉게 되었다.
결론
현대 신학의 직물들은 생생한 색상들과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종교 개혁 이후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우리는 현재 직면한 문제들과 씨름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이 가졌던 영적 깊이와 지적 정직성에 대해 열망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