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와 교제: 갖추어짐과 교통함이 있는 식탁
몇 주 전에 저와 제 가족이 속해 있는 지역 그리스도의 몸인 더 빌리지(The Village)가 한 구성원의 집에서 월례 '이웃 식탁 모임'으로 모였다. 그 날은 이탈리아의 밤으로 정했기에 참석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테마의 요리나 디저트를 준비해 왔다. 파스타, 샐러드, 스트롬볼리, 마늘빵, 쿠키, 치즈 케이크 등으로 주방 카운터는 이탈리아식 요리들로 가득 채워졌다. 사람들이 도착하자 곧 주방을 비롯하여 거실, 출입구, 뒷마당을 채웠다.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다 놓여지자 우리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준비된 음식에 대해 감사 기도와 우리가 모여 있는 이 가정을 위한 축복 기도의 시간을 잠시 가졌다. 그러자 아이들은 자기 접시를 채우며 대화를 다시 시작했고, 모두는 자리에 잡고 앉아서 음식과 함게 서로간의 교제를 즐기게 되었다.
더 빌리지의 삶에서 이것은 매달 두 번째 일요일에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이 모임들은 단순히 좋은 음식을 먹는 기회라는 것 이상으로, 사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함께 모여 빵을 뗄 때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다. 그 식탁에서 우리는 보고 또 보여지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 우리는 제공하고 제공을 받는다. 그곳에서 세대 간의 격차는 해소되어진다. 우정은 발견되어지고 심화된다. 어려움들은 공유되어진다. 격려와 기도가 제공된다. 90%는 평범한 것들이고 10%는 기적적인 것들이다. 그것들은 치즈케이크 한 쪽과 좋은 커피 한 잔으로 구성되며 이는 아름답다.
물론 한 테이블에 함께 모이는 것의 실천과 중요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식사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것이 항상 이탈리아식 뷔페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역사를 통해 식탁은 축하, 환영, 회복, 준비, 안약적 관계의 장소 역할을 해 왔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포로로 잡힌 친척들을 구출해 온 후 그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 (창세기 14:18–20 참조). 아브라함과 사라는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 세 방문객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창세기 18장 참조). 모세와 아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의 70명 장로들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초대 받았으며, 이 일로 그들은 죽게 된 것이 아니라 먹었다(출애굽기 24:9–11 참조).
식사의 규칙적인 리듬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집단 생활 자체는 일곱 종류의 절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레위기 23장 참조). 이 축제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가 약속하신 일을 기대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식사를 지키는 실천은 하나님이 이미 공급해 주셨으며 앞으로 다시 공급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 공동체가 기억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으며 앞으로도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보호해 주셨으며 앞으로도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셨으며 또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예수님 또한 식사 자리에 함께 모이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절기 안에서 익혀진 모든 약속들의 성취였을 뿐 아니라 그 분의 삶 자체가 그를 영접하여 주의 식탁에 모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초대가 되었다. 이 초대는 마지막 만찬에서 분명해 보인다. 예수님은 유월절 떡과 잔을 나누어 주시며 이것은 자신의 몸과 피를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예시한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실천의 핵심에 있는 언약적 식사의 제정을 분명히 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 모여 평판이 좋지 않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읽을 때(마태복음 9:9-13), 또는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자신 스스로를 초대하였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누가복음 19:1-10), 우리에게 그 의미가 그리 명백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식탁이 어디에 있든지 또는 누가 그 식탁 주위에 모였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은 성찬이었다. 그 식탁에서 그는 보고 또한 보여지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는 사랑했으며 사랑 받았다. 그는 제공했고 제공을 받았다. 성인이든 죄인이든 그와 함께 모인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의 삶을 제공했으며 그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일을 하도록 초대했다.
몇 주 전에 예배와 말씀 모임이 끝 부분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며 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성찬을 받도록 초대했다. 첫 번째 사람들이 나와서 작은 빵 조각을 받아 포도주스에 담그고 난 후, 나는 기쁨으로 그들에게 빵과 잔을 건네어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찬을 나누어 주도록 초대했다. 성찬에 참여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예수님이 값없이 제공한 것을 받았으며 그 다음 사람들에게 그 동일한 선물을 주었다. 이것은 내가 성찬식을 실행하는 데 있어 가장 좋아하는 방법 중 하나이며 주님의 식탁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아빠들이 성찬을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지켜봤다. 나는 아이들이 장년들에게 이 성찬을 제공하는 것을 지켜봤다. 나는 조부모들이 대학생들로부터 성찬을 받는 것을 보았다. 나는 믿음의 경험에 있어 미숙한 사람들이 수십 년간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사람들에게 성찬을 제공하는 것을 목격했다. 교회 전체는 이 선물을 값없이 받았고 값없이 주었는데, 아무도 얻어 낸 것이 아니었으며, 측량할 수 없는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다음의 두 번째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식탁 주위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누군가의 주방에서의 모임이 될 것이다. 각자 가지고 올 수 있는 요리들을 가지고 올 것이며,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단지 그들의 참석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거기에는 충분한 것들이 있을 것인데 항상 그럴 것이다. 우리는 함께 웃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각자의 삶을 확인하고, 기도할 것이다. 아이들은 시끄럽게 굴 것이다. 일부 장년들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 가운데서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한 가운데에 계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신실하심을 환영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몸을 그 나라가 임하는 일에 드릴 것이다.
벤 라플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그리어에 있는 빌리지 나사렛교회의 비전/가르침 목사이다.
